작성일 : 09-04-12 01:24
주린자는 복이 있나니(2)
 글쓴이 : 신재형
조회 : 3,796  
1. 사랑으로 빚어진 음식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마르둑(Marduk)은 자신의 어머니인 티아맛(Tiamat)의 머리를 부수고 난 후, 드디어 신들의 지배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신들과 그들의 별자리를 위한 장소를 하늘에 세우고 날과 달을 유지하기 위해 달(Moon)을 만들었지만, 신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굶주렸고, 그 배고픔을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마르둑은 자신의 동료 신들에게 한 가지 계획을 제안한다.

              <피를 뽑아서 한 덩이로 만들 것이며 뼈들로 존재하게 할 것이다.
              나는 야만인을 세울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인간"이 될 것이다.
              참으로 내가 야만적인 사람을 창조할 것이다.
              그는 신들에 대한 봉사를 맡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들은 굶주림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마르둑은 "자기 조상들을 위한 위대한 음식 제사들을 제정하기 위해" 또한 "그들의 남신들과 여신들을 위한 음식 제사들을 제공하기 위해" 반역한 신 킨구(Kingu)의 피로부터 인간ㅇ르 만들었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로 알려진 이 아카드 신화를 번역한 스피즈(E.A Speise)는 자신의 역본의 여백에 창세기 1:26을 언급한다("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의심할 나위 없이 두 창조 기사에는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도 있다. 특히 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음식의 역할이 그렇다. 아카디아인들에게 인간은 신들을 먹이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음식을 제공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인 음식은 창조의 여섯 째 날의 절정을 이루었다. 여섯 째 날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창조로 끝나거나, 아담으로 하여금 땅과 땅의 짐승들을 다스리게 하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은 식단과 함께 끝난다.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과 모든 우상들의 현격한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우상들은 보상(quid pro quo)을 요구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인간의 영역(cycle) 안으로 들여온다. 이는 그들이 인간과 같은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떡이든지, 확언(確言)이든지 혹은 쾌락이든지 말이다. 우상들은 신들로 취급된 거짓 피조물들일 뿐이다. 그들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므로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로부터 어떤 보상도 요구치 않으신다. 아니 어떤 피조물도 그분의 요구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없다. 창조세계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여 순전한 은혜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마르둑처럼 여호와 하나님 역시 식탁을 준비하시는 것으로 그분의 창조사역을 끝맺는다. 하지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마르둑과는 정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식탁을 준비하신다.

음식은 하나님의 본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본질을 계시한다. 어린 아기조차도 음식이 생명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창조기사는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먹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음식과 생명에 관한 이 상식적인 등식은 단지 진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칼빈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철저히 문자 그대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어떻게 생기 없는 죽음 음식이 생명을 줄 수 있는가? "부활"은 어떤 자연적 과정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불러내시는 하나님 한 분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씨가 죽어야 하는 희생적 기적과 마찬가지로 음식은 기적이다. 음식에 대한 의존성을 넘어, 음식은 바로 그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에 완전히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식단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준다. 헬라와 계몽주의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관념과 사상, 그리고 이성의 다른 기능들이 육체와 육체의 욕구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거의 이천년 동안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은, 절대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성이나 그 외 정신적인 능력 안에 주로 위치해 있는 것으로 주장해왔다. 나는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을 반영하는 측량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그 지성의 경이로움을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인간의 두뇌 혹은 사고에 관하여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조용한 명상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인간을 더 부요하게 하는 어떠한 제안도 없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였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계시하거나 혹은 초끈이론의 난해함을 가르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은 아담에게 음식을 제공하셨다. 아담은 결코 계산하고 측량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배가 고팠다.

태초부터 성경은 인간의 굶주림에 관한 실체와 미덕을 지지한다. 물론 죄는 우리의 굶주림에 침투했고, 그래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금지된 열매를 맛보려고 했다. 그러나 죄는 인간 욕구의 근본적인 실체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있기 마련이다. 만일 다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 천국이라면, 우리는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욕망의 대부분이 땅의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아래에 있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굶주림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다. 우리는 그분의 손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손을 펼치시는 그분(the One)을 갈망할 때에라야 오직 쉼을 찾게 된다.

우리가 음식의 선물을 갈망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 음식의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이끌리도록 지음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원에서 아담은 음식을 멀리 하라는 명령을 들은 바 없었다. 그는 선물로 주어진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담은 세상을 먹거리로 제공받았고, 음식의 선물을 즐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즐기도록 지음 받았다. 실제로 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담의 죄는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금지된 열매를 먹었기에 범죄하였다. -그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인정함 없이 그리스고 감사함 없이 먹었다. 그는 마치 음식 그 자체가 자신을 지혜의 생명(life of wisdom)으로 이끄는 것인 양 먹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이 이기적이어서 자신과 함께 이 나무의 열매를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탄의 유혹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는 여호와의 식탁이 결국 마르둑의 식탁과 차이가 엇ㅂ다는 그의 모든 의심과 이해를 같이 한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 우리의 욕구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교제(fellowship)에 대한 욕구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연합(communion)으로, 명예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식에 대한 탐구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분에게로, 음식을 향한 배고픔은 하늘로부터 온 참 떡이신 예수님께로 이끌린다.

이것은 우리가 "물질적인" 배고픔을 일소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순수한 "영적인"갈망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혹은 우리의 "세속적인" 필요들이 "거룩한" 어떤 것으로 "초월"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인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이 탁월한 통찰력으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이분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분법은 종교에 점근하려는 모든 것의 자명한 틀이다". 오히려 "인간이 먹는 음식,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 함께해야만 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려 주기 위해, 또한 인간의 삶을 하나님과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신적인 사랑이 음식을 만들었고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이 지어졌다.

음식의 선물로서 주님의 성찬은 모든 생명, 특히 모든 인간 생명의 내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성찬에서 여호와는 자신만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가져오시는 빛들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신다. 성찬에서 성부는 자신이 낳으신 성육신하신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성찬에서 성부는 우리의 모든 굶주림이 자신 안에서 만족될 것임을 확증하신다. 무엇보다 성찬에서 감미로운 맛과 향이 가득한 떡과 포도주의 선물(the Gift)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the Giving God) 자신이시다.

신재형 09-04-12 01:25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용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으나,
참 아름다운 글귀들이 가득합니다~
신재형 09-04-12 01:38
 
성찬의 음식을 갈망함으로,
그 '기쁨과 사랑의 음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기를,
그 분의 손 안의 어떤 것을 갈망하기 보단 그 분(the One)을 갈망할 수 있기를,
(우리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 주신 음식(그 외의 모든 것까지도)을 통해
우리의 모든 욕구가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