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1-31 00:10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한 것에 대한 고찰
 글쓴이 : 임마누엘
조회 : 4,649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자신의 손자들에게 축복한 것이 믿음인 이유는?

성경은 누가 믿음이 좋고, 누가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위인전이 아니다.
물론 위인전 적인 요소는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요,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각도에서 오늘 던져진 질문도 풀어져야만 한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차자 : 오른손)과 므낫세(장자 : 왼손)에게
요셉의 권유를 뿌리치고 손을 어긋맞겨 축복한 장면은 창48:8-20에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곳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영웅들이 열거되어 있는, 명예의 전당이라도 할 수 있는 히11:21이다. 특히 히11:21에서는
대 서사시와도 같은 야곱의 방대한 여정을 달랑 한 줄로 기록하고 있고 그것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첨가했다는 사실이다.

히11:21을 중심해서 오늘 던져진 질문의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야곱의 믿음을 두 가지로 요약,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손자들을 축복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참 난해한 구절이다.
야곱의 믿음의 현장은 성경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데 히11장 믿음장은 야곱의 믿음의 결정체를 우리의 예상을 초월한 내용을,
그것도 한글문장 자체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과연 왜 야곱의 그 장대한 믿음의 여정을 믿음장에서는 이러한 문장으로 증거하고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야곱의 믿음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야곱은” 야곱의 믿음을 표현하는 내용임을 전제로 한다.
“죽을 때에” 야곱이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는 믿음의 행동을 했던 시기를 말씀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즉 자신의 손자들에게 축복한 행동 자체가 믿음이었다는 말이 된다.
요셉의 두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다. 물론 야곱은 모든 아들들을 축복하기도 했지만
유독 오늘 믿음의 장 본문에서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 즉, 손자들을 축복한 것을 야곱의 믿음의 행위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으로 손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계열에 올려놓는 의미이다.
직역하면 야곱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의 위치로 즉 양아들로 삼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손자들을 축복한 것은 1차적으로 자신의 손자들을 양아들로 삼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창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5)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6)”

각각 “내 것” “나의 아들, 야곱의 아들”, “네 것” “너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라는 뜻이 된다.
즉, 야곱 자신의 손자요, 아들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야곱의 양아들이 되고,
야곱의 증손자이자 요셉의 손자,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요셉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다.

족보가 뒤죽박죽되는 듯한 야곱의 이 이상한 행동을 본문 믿음장에서 믿음의 행동이라고 증거 한다면
여기에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한 첫 번째는 의미는 잃어버린 아들 뿐 아니라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자신의 손자들의 족보상의 위치를 한 단계씩 승격시켜주었다.
그렇다면 먼저 그 승격된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는 요셉은 서열상으로 볼 때 자신의 아버지인 야곱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즉, 아들 요셉이 야곱의 형제와 같은 위치가 된다.

야곱의 형제란 누구인가? 바로 장자권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에서다.
하지만 그 형 에서는 나중에 형제간의 원한을 청산하고 야곱을 장막을 떠나게 된다.

(창 36:6-8)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에서가 야곱을 떠났다는 것은 스스로 약속의 땅을 떠났나는 말씀이 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먹을 것, 즉 소유, 재물 때문이었다.
에서가 이삭의 장막을 떠나 가나안 땅에 머무른 것은 에서가 스스로 교회를 떠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룻기 1장에 엘리멜렉이 가족을 데리고 기근 때문에 유다 베들레헴을 떠난 것이 곧 교회를 떠난 것을 보여주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야곱이 손자들에게 하고 있는 축복은 스스로 교회를 떠나 버린 에서의 자리를 요셉으로 대신하여 채우게 하신 의미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대신하여 야곱에게 주신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대에도 이것과 유사한 일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바로 이삭의 형,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사건이다.
이스마엘 역시 에서처럼 이삭의 장막을 떠났는데 그러면 쫓겨난 이스마엘을 대신한 자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쫓겨난 이스마엘 대신하여 이삭에게 다른 형제를 주시지 않으셨는데, 이는 에서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에서는 이삭의 법적 아들로서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법적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동생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으로 섬겨야 했다. 이는 에서가 야곱을 장자권자로 섬겨야 할 의무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하여 교회를 떠난 형제 대신 다른 믿음의 사람을 그 자리에 채워 넣어주신다.
그 뿐 아니라 야곱은 22년 전에 요셉이라는 한 아들을 잃어버렸지만,
요셉 두 아들을 야곱의 아들로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두 배의 보상을 해주셨다.
평생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요셉의 두 아들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참 성도에게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증거이며 고백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는 많지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형제와 자매와 아비와 어미와 자식을 잃어버린 경우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로해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믿음의 사람 야곱에게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위로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에게 형제와 아들을 동시에 주시면서 위로하셨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의외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된다 말인가? 이제 마지막인데, 죽을 때인데 말이다.
여기에 믿음의 묘미가 담겨져 있다. 야곱의 가장 아팠던 곳,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 있는 그 곳을
하나님께서 바로 아시고(야곱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완전히 치료해주시며, 위로하고 계시는 것이다.
야곱 역시도 한 평생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고
그 야곱의 믿음보다도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더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형제를 잃고, 자식을 잃으면서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주셨던 위로와 동일하게 형제를 주시고, 두 배의 아들을 주시면서 위로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이요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위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오늘 야곱이 받은 위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백배, 천배, 만 배의 위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위로를 받고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요셉의 꿈을 통해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계시에 복종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오래 전 요셉의 나이가 17세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두 가지 꿈
곡식단의 꿈과 일월성신의 꿈을 통해 요셉과 이스라엘(구약 교회)의 미래를 계시해주셨다.

(창 37:6-1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이상의 말씀은 장차 요셉이 큰 권세자가 되어 연약한 교회의 보호자가 될 것을 잘 보여고 있다.
다음의 말씀은 그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창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50: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교회, 불신앙에 가득한 이 형들을 긍휼히 여겨 자신을 높이 세우신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록 자신을 배신하고 죽이려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요셉은 이 연약한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뗄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한 자기 인생의 정체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요셉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종으로 팔려가고 애굽에서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지만
믿음으로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때문이었다.

(시105:17-19)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의 이러한 믿음과 인내는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야곱은 비록 그 당시 요셉의 나이가 어렸으나, 그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비웃고 책망하였으나, 야곱은 한편으로 요셉을 책망하는 듯하면서도
실상 그 마음속에는 요셉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37:11)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야곱이 요셉의 족보상의 위치를 자신과 동격으로 승격시킨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야곱은 이 축복을 통해 오래 전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꿈)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야곱은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의 보호자요 권세자로 세우신 자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서 요셉의 위치를 승격시킨 것이다.
17세에 꾼 꿈과 같이 요셉의 형들은 이제 진정으로 요셉에게 절해야 한다.
이는 단지 요셉의 세상 위치(총리대신) 때문이 아니라 영적 권위 때문이어야 한다.
이전에는 요셉의 세상에서의 위치 때문에 그에게 엎드렸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하여 요셉에게 부여하신 언약적 권위로 인해 엎드려야 한다.
이제 요셉은 이 야곱의 축복으로 인하여 형들의 아버지가 되고 언약의 조상인 야곱과 동등한 위치가 된 것이다.
이것은 혈과 육의 개념을 넘어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영적인 개념이다.

이는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오늘날의 성도들이 직분자, 특히 교역자 연소함을 넘어 그들을 공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 연소한 요셉을 구약 교회를 보호하는 권세자를 삼으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 전체를 보호하는 권세자로 삼으셨고,
이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들을, 교회를 위임한 목사에게 교회를 보호하는 권세자들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사이기에, 목사라는 직책, 자격증에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언약의 권위에 영적인 권위에 고개를 숙이고 복종해야 한다.